Topic/독서

그리스인 조르바, 문학과 지성사

glqdlt 2025. 6. 4. 16:08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8275009&start=slayer

 

그리스인 조르바 : 알라딘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대표작. 사용 인구가 1천만 명 정도인 언어로 쓰인 작품이 이렇게 전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얻은 경우는 흔치 않다. 이미 한국어로 여러 종이 번역되었

www.aladin.co.kr

 

완독일 2024-07-11

완독까지 약 7일이 걸렸다. 내나 버스 출퇴근길에 틈틈이 읽었다. 사실 이 책을 1년 전인 2023년에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는데, 별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가 하필이면 책 말미의 과부 살해 장면이었다. 그와 동시에 "카잔자키스는 여성혐오자다" 라는 리뷰가 떠올랐고, 거부감에 책을 덮어버렸다. 살해 묘사가 너무 적나라해서 읽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책은 1년 가까이 구석에 처박아 두다가, 최근 다시 손에 들었다. 왜? 계기는 시골의사 박경철과 같은 주식계의 유명 인사들이 이 책을 추천해서다. 그러니깐 나는 주식 유튜브를 시청하다가, 뜬금없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냈다는 거다. 이게 참.. 어찌된 계연성인지,알다가도 모를 일일이다.

그렇게 다시 읽게 된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의 몇 안 되는 GOAT 가 되었다. 이 책은 어떠한 삶을 살아온 이의 철학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카잔차키스는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모양이고, 그렇게 나는 니코스 카잔자키스라는 작가의 팬이 되어버렸다. 조만간 다시 한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때는 지금 읽은 그리스어 원전 번역본이 아닌 중역본으로 읽어볼까 한다. 중역본이 디테일에서 다른 느낌을 준다고 하던데 그 차이가 궁금하다.

책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 라는 인물은 사업을 위해 크레타 섬으로 향하는 길에 조르바라는 방랑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와 함께 사업을 하며 겪은 이야기들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사실 회상이라기 보다는 '조르바' 라는 사람에 대한 관찰 일지에 가깝고, 책의 끝은 '나' 라는 인물이 아닌 조르바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책을 읽다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공 '나'가 바라보는 조르바라는 인물의 평이 바뀌는 것을 볼수있다. 처음엔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망나니 정도로 바라보았지만, 나중엔 '나'의 정신적 스승이 된다. 이런 관계의 변화, 그리고 조르바와 '나'를 비교해가며 읽는 것도 하나의 재밋거리다. 조르바는 야성적이고 본능적이며, 가끔은 순수하다 못해 아이처럼 보이지만, 반면 '나'는 책으로만 세상을 배운 이성적인 인물이다. 심지어 외모도 정반대인데, 조르바는 노인이고 '나'는 젊은 남성이다. 그런데도 조르바는 '나'를 자신과 같은 부류로 느끼곤 한다. 서로 N과 S극 처럼 다르지만, 본성은 닮았다는 뭐 그런 느낌으로.

초반에 이야기했던 '카잔자키스는 여성혐오자'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오해이지 싶다. 카잔자키스는 여성을 혐오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성에 대한 찬미를 하는 양반이다. 아무래도 이 책에서 남자가 여성보다 더 고등생물로 묘사되고 여자는 하등한 존재처럼 표현되는 점은 사실인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작가의 여성 찬가가 노골적으로 배여있다. 아무리 남자가 더 높은 고등생물이라도 결국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에 깔리기를 바라는 단순한 존재라고 작가는 말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영혼마저도 남자는 여성에게 깔리길 원하는 존재아니, 어느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조르바가 제우스 신을 찬미하는 부분을 보면, 제우스라는- 모든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뚱뚱하든, 나이가 들었든, 어쨋든 간에 모든 여성에게 사랑을 정렬적으로, 그리고 그 여성만을 위해 자신의 허리가 끊어지도록 밤의 봉사를 하는 남자에게, 찬사와 경의를 표한다. 제우스처럼 이 세상 모든 남자들도, 어떠한 여성이든 간에 사랑해주어야 한다는게 조르바의 철학이다. 세상 모든 여자가 외롭게 방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조르바는 그런 남자이고, 노년의 뚱뚱한 과부 마담 오르탕스,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절세미녀 과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르바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은 세상에 죄를 짓는것이라는 그런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미모 때문에 마을 남자들이 모두 넋을 놓고, 싸우고, 심지어 상상병에 자살까지 하게 되고, 나중엔 ㅅ마을 여자들과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한 남자들에 의해 과부는 살해당한다. 질투와 탐욕이 절세 미녀를 살해한 것이다. 조르바는 그녀의 죽음을 두고 '저런 아름다운 여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땅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라며 탄식 한다. 조르바의 철학은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한다기보다, 여성 그 자체를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여긴다. 여자는 사랑받기 위해 어리석은 짓도 마다하지 않는 외로운 존재이며, 남자는 그런 여성을 쫓아가는 것이 남자의 본성이란다. 누가 우위라는 얘기라기보단 남녀라는 존재 자체의 보편적 특성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보는 여성이란 이런 것이리라.

책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도 등장한다. 수도원 방문 장면에서 묘사된 타락한 수도승들의 모습은 작가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준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내면의 욕망을 숨기고 몰래 몰래 채우는 이들의 위선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말미에는 광신도에 의해서 수도원은 불타며 종극을 맞는다. 타락한 수도원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재밋는데,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아닌 척하며 몰래몰래 욕망을 채우는 인물들이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고 싶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마가 술을 원한다는 둥 연기를 하며 마시는 인물이라던지, 사제 지간의 지위를 악용해 남성 제자의 엉덩이를 탐내는 남성 사제에 대한 이야기 등이 있다. 조르바는 이들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한 결과, 오히려 악마에게 지배당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선 종종 신과 악마가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데, 결국 그것들은 인간 내면의 본능을 상징하는 것 같다. 조르바가 말하길 악마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그 악마가 원하는 것을 실컷 해서 질리게 만들면 된다고 하는데, 욕망에 솔직하고 본능에 충실한 조르바 다운 대답이다. 이는 인간 사회가 만든 도덕, 규범, 에티켓 같은 것들이 얼마나 허구적인가에 대한 통찰로도 읽힌다.

이 책에서 가장 울림을 주었던 것은 실천하는 삶이, 진정한 삶이라는 조르바의 메세지였다. 주인공 '나' 와 조르바 둘다 모두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인물이지만, 주인공 '나'는 경험이 아닌 책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을 했온 인물이고, 조르바는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삶을 간접 체험으로 살아온 주인공의 고뇌는, 삶을 직접 살아가는 조르바에게서 매우 간단하게 논파되고 해결되어 버린다. 사랑도 해보고, 심지어 전쟁 속에서 살인도 해본 그에게 있어서 주인공의 고민은 모두 부질없고 하찮은 것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은 실천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게 조르바의 말이다. 조르바는 책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이런 충고를 해준다. 이러한 충고는 주인공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나'는 조르바의 비판을 거부한다. 하지만 책의 말미에는 이치를 깨닫고 조르바의 충고를 수용한다. 이러한 '나'의 심정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나' 가 틈틈이 써온 '부처' 라는 가상의 인물이다. '나' 는 이상적인 가상의 인물인 '부처' 라는 인물을 글로 만들어나갔는데 , 말미에는 이를 그만두고, 스스로가 직접 '부처' 가 되어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조르바 관찰일기와 동시에 '나'의 성장일기일기라 할수있을지도. 

결국 이 책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삶이란, 실천해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 작가 카잔차키스는 실제로 전 세계를 여행하며 직접 삶을 체험했고, 그런 실천의 중요성을 담은 에세이들도 여럿 남겼다. 여담이지만,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도 실천하는 삶에 대한 메시지가 나왔던 게 떠오른다. 나처럼 책과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접해온 사람에게 이 책은 깊은 고민을 던진다. '나는 정말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